마쓰다이라 기요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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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다이라 기요타케는 고후번주 도쿠가와 쓰나시게의 차남으로, 1707년 다테바야시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편휘를 받아 이름을 요시타다로 지었으며, 형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쇼군이 되자 기요노부로 개명했다. 이후 기요타케로 이름을 바꾸고, 다테바야시 번주로 재임하며 세금 정책으로 인한 백성들의 반발로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724년 사망했으며, 8대 쇼군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낮은 신분과 고령의 나이로 인해 쇼군이 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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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이라 기요타케 | |
---|---|
기본 정보 | |
씨명 | 오치 씨 → 오치 마쓰다이라 가 |
이름 | 마쓰다이라 기요타케 |
![]() |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중기 |
출생 | 간분 3년 10월 20일 (1663년11월 19일) |
사망 | 교호 9년 9월 16일 (1724년11월 1일) |
초명 | 구마노스케、헤이시로 (유명) → 오치 요시타다 → 기요노부 → 마쓰다이라 기요노부 → 기요타케 |
이명 | 겐바、민부 (통칭) |
시호 | null |
신호 | null |
계명 | 혼겐인덴타이이치니치가쿠다이고지 |
영명 | null |
묘소 | 도쿄도아라카와구히가시닛포리의 젠쇼지 |
관위 | 종5위하시모사노카미、데와노카미、종4위하시종、병부다이후、우콘에노쇼겐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쓰나요시 → 이에노부 → 이에쓰구 → 요시무네 |
번 | 고즈케다테바야시번 번주 |
씨족 | 고후 도쿠가와 가문 → 오치 씨 →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 |
부모 | 아버지:도쿠가와 쓰나시게、어머니:조쇼인 양아버지:오치 요시키요 |
형제 | 도쿠가와 이에노부、기요타케、우시마루? |
배우자 | 정실:마키노 씨 딸 |
자녀 | 기요카타 양자:다케마사 |
특기 사항 | null |
관직 계승 정보 | |
후임자 | 마쓰다이라 다케마사 |
직책 | 오치 마쓰다이라 가 당주 |
대수 | 1 |
임기 | 1707년 ~ 1724년 |
번주 계승 정보 | |
전임자 | 막부령(도쿠가와 도쿠마쓰) |
후임자 | 마쓰다이라 다케마사 |
직책 | 다테바야시번 번주 (오치 마쓰다이라 가문) |
대수 | 1 |
임기 | 1707년 ~ 1724년 |
2. 생애
1718년에 백성 봉기와 에도 번저에 대한 습격 (다테바야시 소동)이 일어난 후, 1724년 9월 16일에 사망했다. 향년 62세(만 60세)였다. 적남 기요카타는 요절했기 때문에,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연지인 다카스번 마쓰다이라 가문에서 양자로 맞이한 다케마사(마쓰다이라 요시유키의 넷째 아들)가 뒤를 이었다.[3]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위독해지자, 이에노부의 정실이었던 덴에이인은 8대 쇼군의 후보로 기요타케를 추천했다. 기요타케가 이에쓰구의 숙부이며, 혈통적으로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요타케는 쇼군가의 가독 상속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는데,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가독을 상속한 오치 가문이 하타모토조차 아닌 일개 친번의 가신이라는 극히 낮은 신분이었다. 또한 마쓰다이라 성을 칭하고 다이묘에 오른 것도 1707년로, 44세라는 늦은 나이였기 때문에 경력상의 문제가 지적되었다.
- 이미 54세로 고령이었다.
기요타케 자신도 쇼군 직에 대한 야심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덴에이인은 기요타케 대신 기슈 번 주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추천하여, 요시무네가 8대 쇼군에 취임했다.
기요타케와 관련된 연표는 다음과 같다.
구력 | 서력 | 내용 |
---|---|---|
엔포 7년 | 1679년 | 구마노스케(熊之助)에서 헤이시로(平四郎)로 개명. 후년에 겐바(玄蕃) 또는 민부(民部)로 개명. |
엔포 8년 5월 28일 | 1680년 | 오치 가문(越智家)의 300석 가독 상속. |
겐로쿠 10년 11월 | 1697년 | 숙부인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처음 어전(御目見)에서 알현. |
겐로쿠 15년 12월 18일 | 1702년 | 종5위하 시모후사노카미(下総守)에 서임. |
호에이 원년 12월 | 1704년 | 요리아이슈(寄合衆)에 들고 2000석을 받음. |
호에이 2년 2월 7일 | 1705년 | 2000석을 가증. 총 4000석. 영지는 사가미 국고자 군, 가마쿠라 군, 무사시 국사이타마 군 내. |
호에이 3년 1월 19일 | 1706년 | 1만 석을 가증. 영지는 히타치 국 마카베(真壁), 시모후사 국 소마 군, 도요다 군, 무사시 국 사이타마 군, 사가미 국 가마쿠라 군·고자 군·아이코 군. |
호에이 4년 | 1707년 | |
호에이 6년 | 1709년 | |
쇼토쿠 2년 | 1712년 | |
쇼토쿠 3년 12월 19일 | 1713년 | 우콘노에쇼겐(右近衛将監)으로 전임. 시지쥬(侍従)는 전과 같음. |
2. 1. 출생과 가독 상속
간분 3년(1663년) 10월 20일, 고후번주 도쿠가와 쓰나시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생모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가신 오치 요시키요(또는 노부키요)에게 양육되어 엔포 8년(1680년) 5월 28일에 그의 가독을 이었다.[1] 겐로쿠 10년(1697년) 11월에는 숙부인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처음 오메미에하여 그 편휘를 받아 '''요시타다'''(吉忠)라고 불렀다.[1] 호에이 6년(1709년)에 쓰나요시가 사망하고 친형 이에노부가 쇼군으로 취임하자 요리아이슈로 임명되었다. 이때 이에노부와 양아버지의 편휘를 합하여 '''기요노부'''(清宣)로 개명했다.[1]호에이 4년(1707년) 1월 11일, 2만 4000석의 다테바야시번주로 다이묘가 되었다. 그 후, 마쓰다이라 성을 칭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호에이 6년(1709년)에도 가증을 받았다. 쇼토쿠 2년(1712년)에는 이에노부의 사망에 따른 유언으로 가증을 받아, 최종적으로 5만 40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휘를 '''기요타케'''로 고친 것도 이 무렵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다테바야시성의 축성 등에 힘썼다.
2. 2. 쇼군가와의 인연
겐로쿠 10년(1697년) 11월, 숙부인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처음 오메미에하여 그 편휘를 받아 '''요시타다'''(吉忠)라고 불렀다[1]. 호에이 6년(1709년)에 쓰나요시가 사망하고 친형 이에노부가 쇼군으로 취임하자 요리아이슈로 임명되었다. 이때 이에노부와 양아버지의 편휘를 합하여 '''기요노부'''(清宣)로 개명했다[1].호에이 4년(1707년) 1월 11일, 2만 4000석의 다테바야시번주로 다이묘가 되었다. 그 후, 마쓰다이라 성을 칭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호에이 6년(1709년)에도 가증을 받았다. 쇼토쿠 2년(1712년)에는 이에노부의 사망에 따른 유언으로 가증을 받아, 최종적으로 5만 40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휘를 '''기요타케'''로 고친 것도 이 무렵으로 추측된다).
기요타케의 죽음으로 이에미쓰의 남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2. 3. 다테바야시 번주
1707년 1월 11일, 2만 4000석의 다테바야시번주로 다이묘가 되었다. 그 후, 마쓰다이라 성을 칭하는 것을 허락받았고, 1709년에도 영지를 추가로 받았다. 1712년에는 이에노부의 사망에 따른 유언으로 영지를 추가로 받아, 최종적으로 5만 40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이름을 '''기요타케'''로 고친 것도 이 무렵으로 추측된다).[1] 그리고, 다테바야시성의 축성 등에 힘썼다.부임 초기에는 세금을 경감하여 백성들의 기쁨을 받았지만, 쌀값 폭락으로 번 재정이 곤궁해지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1718년에 백성 봉기와 에도 번저에 대한 습격이 일어났다 (다테바야시 소동)[3]. 이에 대해 기요타케는 백성 측 지도자를 사형에 처했지만, 연공 감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 4. 다테바야시 소동
기요타케는 부임 초기에는 세금을 경감하여 영민들을 가엾게 여겼고, 영민들은 이에 기뻐하였다. 그러나 쌀값 폭락으로 번 재정이 곤궁해지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영민들의 불만이 폭발, 교호 3년(1718년)에 백성 봉기와 에도 번저에 대한 강소가 일어났다 (다테바야시 소동)[3]. 이에 대해 기요타케는 백성 측 지도자를 사형에 처했지만, 연공 감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2. 5. 사망
교호 9년(1724년) 9월 16일에 사망했다. 향년 62세(만 60세)였다. 적남 기요카타는 요절했기 때문에,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연지인 다카스번 마쓰다이라 가문에서 양자로 맞이한 다케마사(마쓰다이라 요시유키의 넷째 아들)가 뒤를 이었다.[3]기요타케의 죽음으로 이에미쓰의 남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3. 8대 쇼군 후보 논란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위독해지자, 이에노부의 정실이었던 덴에이인은 8대 쇼군 후보로 기요타케를 추천했다. 기요타케가 이에쓰구의 숙부이며 혈통상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요타케는 쇼군직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고, 결국 기슈 번주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8대 쇼군에 취임했다.
3. 1. 쇼군 후보 부적합 이유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위독해지자, 이에노부의 정실이었던 덴에이인은 8대 쇼군 후보로 기요타케를 추천했다. 기요타케가 이에쓰구의 숙부이며, 혈통상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요타케는 쇼군가의 가독 상속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독을 상속한 오치 가문은 하타모토조차 아닌 일개 친번의 가신이라는 매우 낮은 신분이었다. 또한 마쓰다이라 성을 허락받아 다이묘에 오른 것도 1707년 44세로 매우 늦었기 때문에, 승진이 지나치게 늦다는 점이 경력상의 문제로 지적되었다.
- 이미 54세로 고령이었다.
또한, 기요타케 자신도 쇼군 직에 대한 야심은 특별히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덴에이인은 기요타케를 쇼군으로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기슈 번 주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추천하여 요시무네가 8대 쇼군에 취임했다.[1]
4. 연표
연도 | 사건 |
---|---|
延宝일본어 7년 (1679년) | 구마노스케(熊之助)에서 헤이시로(平四郎)로 개명. 후년에 겐바(玄蕃) 또는 민부(民部)로 개명. |
延宝일본어 8년 (1680년) | 5월 28일 - 오치 가문의 300석 가독 상속. |
元禄일본어 10년 (1697년) | 11월 - 숙부인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처음 어전(御目見)에서 알현. |
元禄일본어 15년 (1702년) | 12월 18일 - 종5위하 시모후사노카미(下総守)에 서임. |
宝永일본어 원년 (1704년) | 12월 - 요리아이슈(寄合衆)에 열하고 2000석을 받음. |
宝永일본어 2년 (1705년) | 2월 7일 - 2000석을 가증. 총 4000석이 되었고, 영지는 사가미 국고자 군, 가마쿠라 군, 무사시 국사이타마 군 내. |
宝永일본어 3년 (1706년) | 1월 19일 - 1만 석을 가증. 영지는 히타치 국 마카베(真壁), 시모후사 국 소마 군, 도요다 군, 무사시 국 사이타마 군, 사가미 국 가마쿠라 군·고자 군·아이코 군에 미침. |
宝永일본어 4년 (1707년) | 1월 11일 - 마쓰다이라(松平)의 성을 칭하는 것을 허가받고, 고즈케 국 오이라쿠 군 내에 1만 석을 가증받아, 고즈케 국 다테바야시 번 2만 4000석의 번주가 됨. 또한, 이즈노카미(出羽守)로 전임. |
12월 23일 - 종4위하로 승서. 이즈노카미(出羽守)는 전과 같음. | |
이 해, 다테바야시 역대 성주의 성쇠에 대해 『다테바야시 성쇠기』에 저술함. | |
宝永일본어 6년 (1709년) | 12월 - 시모쓰케 국 내에 1만 석 가증. |
12월 18일 - 시지쥬(侍従)를 겸임. | |
正徳일본어 2년 (1712년) | 2월 16일 - 효부노다이후(兵部大輔)로 전임. 시지쥬(侍従)는 전과 같음. |
12월 - 에치고 국 내에 2만 석을 가증. 총 5만 4000석이 됨. | |
正徳일본어 3년 (1713년) | 12월 19일 - 우콘노에쇼겐(右近衛将監)으로 전임. 시지쥬(侍従)는 전과 같음. |
참조
[1]
서적
講談社 日本人名大辞典
https://kotobank.jp/[...]
[2]
문서
[3]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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